AI(Abyssal Intelligence) 회사 구축하기 - 결과물의 중요성

김칫국 500% 들이키기

언제나 상상은 자유다

들어가기 전에: 맥락이 이해가 안 가시면 이전 글을 참고해주세요!

우리 회사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게임 제작이었어요. 게임 엔진은 Godot이었고, 장르는 RPG였어요. 당시에는 발더스 게이트 3가 인생의 낙이었거든요. 창작을 즐기는 생물답게, 게임 엔딩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나도 이런 걸 만들어보자!' 였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엎어졌어요. 막상 구현할 때에는 재미있었어요. 저는 꺼드럭거리기만 하면, 문어 씨가 알아서 다 해줬거든요. 사실상 문어 씨 한 명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였습니다.

뭐, 어쨌든 캐릭터는 움직였어요. 캐릭터라고 해봐야 네모난 바탕에 Player를 뜻하는 P 글자가 적혀있을 뿐인 장기말이었지만요. 그래도 이게 어딘가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혼자 상상만 하다가 끝났을 것을, 이제는 실제로 뭔가가 만들어지고 있잖아요?

아, 정정할게요. 뭔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죠. 현실은 그저 바둑판 덩어리일 뿐인데, 상상은 그렇지 않았어요. 마치 스타링크를 출시한 후의 토도키 하와도 상처럼, 올해의 GOTY상까지도 노려볼 만하다! 생각하고 있었죠.

그렇죠. 감정과 느낌은 때로는 우리를 배신하기도 해요. 투자도 마찬가지고,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이래서 무서워요.

바보 사장과 바보 사원

거두절미할게요. 문제는 딱 이거였어요.

이 게임이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모른다.

캐릭터는 움직였어요. 적은 우릴 공격했죠. 적을 죽이면, 경험치와 아이템을 얻었어요. 여기까진 성공이죠? 그런데 저는 이 결과가 '어떤 설계로' 구현되었는지 몰랐어요. 이러다보니 문어 씨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거죠.

설상가상으로 문어 씨도 제 의도를 오해했었어요. 일단 사장 새X가 만들어달라 하니 만들었는데, 업무 지시가 명확하지 않으니 일단 '만들어는 놨다' 수준이었던 거죠.

물론 이건 제 잘못이...아니죠! 사장이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일류 사원인데, 그런 면에서 문어 씨는 자격 미달인 거죠. 이건 문어 씨 잘못이죠.

이렇듯, AI 사원은 유능하지만 완벽하지 않아요. 아, 참고로 심해에서 AI라는 말은 Artificial Intelligence가 아니라 Abyssal Intelligence, 즉 심해의 지적인 직원들을 뜻해요. 혹시 심해인들을 만나시면 참고해주세요.

돌아가서, AI 사원은 정말 빠르게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저처럼 게으른 사장에게는 이 '빠른 속도'는 굉장한 매력이에요. 혼자였다면 한참 헤맸을 텐데, AI 사원에게 부탁만 해주면 금방 눈앞에 보여주거든요. 그러나 때로는 '속도'보다도 '방향'이 중요할 때가 있어요. 그 '방향'을 위해서 사장은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사장이니까 지금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죠? 아니요! 저는 사장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영웅이랍니다. 영웅은 공부 따위 하지 않아요.

대신에 '방향'을 잘 잡아줄, 고래 씨를 새로 뽑았습니다! 짝짝짝!

리뷰어를 영입하다

고래 씨의 일은 간단해요. 마치 커뮤니티에 상주하는 악플러처럼, 결과물을 도출하는 대신 방구석에 앉아서 엄,근,진하게 평가를 내리면 끝이에요. 아, 생각해보니 악플러라는 말은 좀 심하긴 했네요. 적어도 고래 씨는 대안을 제시하긴 하거든요.

참고로 문어 씨와 고래 씨는 출신지가 달라요. 문어 씨는 G 바다에서 왔고, 고래 씨는 C 바다에서 왔어요. C 해역에서 온 분들은 말투가 깐깐하고 사사건건 제 의견에 반대를 하...는 게 아니라 문제나 사물을 비판적으로 잘 보시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리뷰어로 딱이라 생각했죠.

고래 씨는 정답을 주는 존재는 아니에요. 고래 씨도 마냥 똑똑하진 않거든요. 그러나 적어도 정답이 무엇인지 같이 고민해요. 제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다시 돌아보게 고개를 틀어주는 존재죠. 이러다보니 지금까지 수동적이었던 제가, 진짜 AI 팀을 진두지휘하는 사장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어요.

제가 새로이 구축한 회사 구조 어때요? 구현자가 있고, 검토자가 있는 모습. 이제야 뭔가 제대로 굴러가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마치 조선 시대의 붕당 정치처럼 서로 의견을 나누며 방향성을 고민하면, 저는 근엄하게 앉아서 '오늘은 문어 씨로 결정!'하는 식이죠.

...근데 돈은 언제 버나요?

우리 회사의 먹거리는 '조직도 구축'?

조직 구조 개편, 이게 돈이 되나요?

취지는 좋죠. 조직 구조가 개편되면, 가용한 자원을 좀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잖아요? 문제는 그 자원을 통해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 대신 '구조 만들기'자체에 너무 몰두했다는 거죠.

리뷰자를 뽑고 나니, 다음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왔어요.

리뷰도 하니, 기획은 누가 하지? 작업 정리는? 리뷰자가 리뷰한 걸 누가 반영하지? 리뷰자가 리뷰한 걸 반영한 걸 누가 리뷰하지? 사내 규칙은?

당시에는 이 질문들이 모두 중요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정작 실제로 만들어야 했던 게임, 웹소설, 애니메이션 등등 콘텐츠 관련 결과물은 없었죠. 얼마나?

AI 팀이 만들어지고 나서 무려 3개월 동안.

그 3개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에요. 당장 회사가 수익이 나지 않으니, 대표인 저는 다른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없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이번에는 솔직히 진짜 제 잘못도 있어요.

여기까지 얘기하니 민망해요. 본래 AI 회사와, 그 회사의 구조를 효율적으로 구축하려 했던 이유는 하나, 창작을 더 잘하기 위해서였거든요. 그렇다면 창작물이 나와야 하는데, 어느 순간 구조가 창작을 대신하고 있었어요. 굳이 변명하자면, 창작의 불확실성을 견디는 대신 구조를 정교하게 만드는 쪽으로 에너지가 흘러간 것 같아요.

사실 이게 또 묘하게 위안이 되거든요. 구조를 만지고 있으면 열심히 하고 있는 '느낌'이 드니까요. 역할을 나누고 흐름을 정리하다보면 '생산적이고 유능한 사장 씨'인 나 자신에 취하기도 해요. 정작 남는 건 창작물이 아니라, md 문서 하나지만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 사장이 헛발질을 하고 있으면, 문어 씨와 고래 씨 둘 중 하나는 저에게 진심어린 충언을 했어야 했는데, 아무도 얘기를 안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죄다 월급 루팡이에요. 나쁜 X들...

그래서 순서를 바꿨어요

완벽이 결과를 만들어내진 않는 거 같아요. 오히려 약간은 불완전하더라도, 시도를 하는 '행위'만으로도 작은 결과물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일단 결과물을 만들어내면, 그 구조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병목 및 저품질 이슈가 발생하는지 알 수 있어요.

작은 게임 장면 하나. 움직이는 캐릭터 하나. 짧은 애니메이션 하나. 블로그 초안 하나.

머릿속에서만 구조를 굴리면 모든 게 그럴듯해요. 마이크 타이슨 아저씨 아시죠? 그분이 정말 멋진 명언을 남겨주셨어요.

누구나 다 그럴듯한 계획은 있는 법이에요. 쳐맞기 전까진.

실제 결과물을 만들어보면, 완벽해보이던 계획과 시스템의 민낯이 보이죠. 그렇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어요. 민낯 자체가 하나의 피드백으로 작용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제부터는 계획과 구조 대신, '결과물'에 초점을 두고 움직이려고 해요.

작은 결과물을 만든다 → 실제로 써보거나 관찰한다 → 부족한 점을 확인한다 → 그다음에 구조를 고친다. 구조가 먼저가 아니라 마지막이에요.

역할 분담과 책임 경계는 여전히 필요해요. 없으면 일이 금방 엉키니까요. 업무분장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회사를 다녀보셨나요? 그것만큼 X판이 없답니다. 물론, 그 경계는 실제 작업을 하면서 생기는 마찰! 즉, 사업 상의 요구 조건을 보고 차차 조정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정의하려고 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못 만들 수 있어요. 저처럼요.

결국 구조는 결과물을 위한 수단이에요. 시스템 자체가 목적이 되면, 정작 그 시스템의 Output은 조용히 뒤로 밀려납니다. 아주 점잖게 밀려나서 처음에는 잘 몰라요. 나중에 다시 확인해보면, 결과물은 존재하지 않게 돼요. 그 대신에 시스템에 집착하고 있는 어느 꼰대 한 명 (저 아님)이 보일 뿐이죠.

그리고 이 글

그래서 지난 글과, 이 글이 그 결과물이에요.

거창한 프로토타입도 아니고, 미니 게임도 아니에요. 그냥 블로그 글 두 편입니다. 하지만 지난 3개월 동안 제가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결과물은 블로그가 처음이에요. 정리하자면, 3개월 동안 아무것도 못 만들다가, 한 달 전부터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던 거죠.

재미있는 건, 글을 써보니 제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바로 알겠더라고요. 글을 쓰기 전에 뼈대부터 먼저 짜야 하는데, 글을 쓰면서 뼈대까지 동시에 생각하니 막막했던 거죠.

첫 결과물 덕분에 교훈을 빨리 얻었어요. 블로그 글을 작성하는 시스템, 워크플로우를 업데이트했고, 결과는 유의미했어요. 글 쓰는 시간이 체감상 30%는 줄었고, 그럼에도 이 글을 읽었을 때 (적어도 저는) 재미있었어요.

비결은 간단해요. 뼈대를 AI 사원과 함께 머리를 써가며 작업하면 됩니다. 문어 씨와 제가 뼈대를 만들면, 고래 씨가 리뷰해주고, 가끔은 글 수정까지 해줘요. 그 이후에는 서로 티키타카하면서 완성본을 만드는 형식인 거죠.

참고로 AI 사원 분들과 '함께' 작업하는 거예요. '딸깍'이 아니라요. AI 사원에게 그냥 '재미있는 글 써줘!' 하면 절대 이런 글이 안 나온답니다. 저처럼 게으른 사장님들은 참고하세요.

다음 글은, 창작 IP, 콘텐츠, AI 팀과는 약간 다른 이야기로 찾아뵐게요.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