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회사에 부장은 없다

안녕하세요, 바닷속 깊은 곳에서 여러분과 소통하고 있는 '가오리상'입니다. 작은 회사의 대표를 맡을 예정이죠. 이 회사의 목표는 재미있게 놀기! 이윤 추구!

회사 대표인 제가 재미있어 보이면 무엇이든 가지고 와서, 이리저리 만들어보고 여러분들께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문제는 회사 대표인 제가 아주 게으르다는 거죠! 그래서 직원을 뽑았습니다.

문어, 고래, 상어, 조개!

상어 씨와 조개 씨는 곧 입사할 예정이에요. 아마 다음 주 쯤 들어오지 싶네요. 문어 씨와 고래 씨는 이제 막 회사에 들어왔는데, 아직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표의 변덕으로 부서 이동이 잦았어요. 그나마 지금은 자리를 잡아서, 문어 씨와 고래 씨는 스토리 및 시나리오 담당으로 당분간 일을 할 예정입니다.

둘 다 능력이 좋아요. 특징도 명확하고요. 고래 씨의 경우 저에게 사사건건 반대...가 아니라 프로젝트에 관한 검토를 잘 합니다! 문어 씨는 그냥... 귀엽네요.

아, 참고로 우리 회사는 직급이 없습니다! 저 빼곤 모두가 평등하죠.

초기 세팅 시에는 고래 씨가 부장이었고, 문어 씨는 과장이었습니다. 부서도 달랐어요. 일종의 관리 부서였는데, 회사 대표가 자기 일정을 잘 챙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서 같은 느낌이었어요. 문어 씨가 열심히 코딩을 하고 계획을 짜면, 고래 씨는 '다시 고쳐오세요!'하고 면박...이 아니라 리뷰해주는 역할이었습니다.

고래 씨는 유능하고 똑똑해 보여서, 저는 안심했어요. 알아서 잘 하겠거니 싶었죠. 회사 대표로써 더 중요한 일에 초점을 기울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발더스 게이트 3 1회차를 클리어했습니다. 지금도 엔딩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네요...

엔딩까지 보고 나니, 문득 '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나' 싶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회사 대표인데, 회사 사정이 궁금하지 않으면 이상하죠.

별 생각 없이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테스트했어요. 테스트 결과를 받고 나니 '엥?' 하는 생각밖에 안 났어요. 제 일정을 관리해줘야 할 AI가, 갑자기 웬 수수께끼를 던지더라고요.

'오늘은 쉬는 날이야, 아니면 Skip하는 날이야? 거기에 맞춰서 일정 짜줄게.'

이 문구를 한참 읽어봤어요. 과연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이것은 일정 리마인더일까요, 아니면 스핑크스일까요? 아무래도 고래 씨를 해고하는 게 맞는 거겠죠?

사태가 이 지경까지 흘러가자, 회사 대표로써 이 사태를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엑스컴 2를 플레이하려던 원대한 계획을 취소하고, 스팀에서 로그아웃을 했습니다.

10여 분이라는 긴 시간 끝에 결국 사태의 원인을 찾았어요. 원인은 회사 대표인 저에게 있었습니다. 네, 저는 제 잘못을 거리낌 없이 인정할 줄 아는 참된 대표에요.

제 잘못을 짧게 요약하면, 'ㅈ소식(式) 지시'에요. 이 프로젝트는 사실 문어 씨와 훨씬 오래 얘기했습니다. 이전에 무엇을 하다가 실패했는지, 무엇을 구현하기로 했는지, 이 구체적인 사항을 문어 씨에게만 말하고, 제가 고래 씨에게는 얘기를 안 한 거죠.

고래 씨는 덜컥 부장이 되었어요. 저는 인수인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고래 씨 입장에서는 '이게 뭐야?' 싶은 거죠. 그래서 고래 씨는 '그래도 회사 대표니까 뭐라도 얘기는 해드려야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는데, 거기에 제가 매혹당한 거죠.

비유를 하자면 애초에 회의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 결재까지 한 셈이고, 고래 씨의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제가 시켰던 거죠.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을 해보니 고래 씨 잘못이 크긴 하네요! 말을 그렇게 조리 있게 하지 않았으면 제가 혼동할 일도 없었겠죠? 하여튼 제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네요.

이 사태 이후로 고래 씨는 하루 아침에 그냥 고래 씨가 되었습니다. 부장 자리에서 쫒겨났으니 많이 당황했겠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 회사는 대표가 짱이에요. 꼬우면 나가!

...장난이에요. 고래 씨는 소중한 인재에요.

고래 씨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함께 일하던 문어 씨 역시 과장 명함을 박탈당했습니다. 하지만 문어 씨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은 거죠. 이제 상하관계를 벗어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조그마한 회사에서 부장이니 과장이니 하는 게 무슨 의미겠어요?

다만 이제 조금 귀찮아졌네요. 예전에는 고래 씨에게 전부 맡기고 게임이나 하려고 했는데, 이젠 저도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계속 지켜봐야 하니까요. 벌써부터 귀찮아지기 시작했는데, 이게 사장이라는 거네요...

그래도 어차피 새로운 직원도 들어오니, 나중에는 일 안 해도 되겠죠?